수녀원 소식
지금, 성가소비녀회에서 알려드립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과 머물 천막을 치다. (총장 유 엘리사 수녀님) | ||
|---|---|---|
| 작성자 성가소비녀회 | 조회수 13 | 작성일 2025.11.06 |
|
그분과 함께, 그분과 머물 천막을 치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가장 절박했던 위기의 때를 꼽는다면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대다수의 백성들이 타국으로 유배를 떠났던 시기일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라고 탄식합니다.(에제 37,11 참조) 뼈마저 말랐으니 생명은 사라지고 내일이 없는 현실입니다. 그 시기에 하느님은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을 살아나게 하여라”(에제 37,9 참조) 하시며 내일이 없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하도록 에제키엘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하느님이 에제키엘 예언자를 부르신 것처럼, 생명의 숨을 사방에서 불러들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로 지금’ 전환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은 이토록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스런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하여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강생하신 사람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복음에서 강생(육화)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사람이 되셨다’(sarx egéneto, 요한 1,14)라고 사스(sarx)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자가 “살이 되는”(sarx egéneto, 요한 1,14) 것처럼, 루카 복음 1장 35절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할 때, “덮다”를 뜻하는 그리스어(episkiásei: epi“위”+ skené 천막)는 “천막”에서 온 말로, 성령 역시 우리 가운데 “그분의 천막을 치고” 그의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천막’은 우리 가운데서 계속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합니다. 이를테면 천막은 하느님이 인간 존재들과 함께 머무시는 성전을 뜻합니다.(탈출 40,34-36; 25,8; 26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중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막을 만들고 성막은 그들과 함께 이동했습니다.(탈출 25, 8-9. 40 참조) 이동할 때 해체해서 옮길 수 있는 구조물이었던 성막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만나시는 곳으로 만남의 천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탈출 27,21; 민수 2,2; 7,5 참조) 성막은 후에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성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 줍니다.(히브 8,2.5-6, 9,11-12.24 참조) 특히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구절에 하느님 거처로써 성막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머무신다는 것을 상징했던 구약의 성막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강생’으로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과 사명을 확장시켜 가는 발걸음, 강생의 새로운 성소! 우리는 최근 10년 동안 성소 계발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입회자가 없었고 현 수도생활 방식으로는 새로운 성소자가 오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도생활이 아닌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강생의 영성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 영성과 사명을 어떻게 나누며 이어갈지, 새로운 구조와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제16차 총회 때부터 평신도와 함께 하는 성소로의 확장에 대한 의견이 있었고, 17차 회기 후반부에 ‘강생의 새로운 성소’에 대한 연구와 모임이 총원과 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차 총회는 다양한 생명 공동체 구성에 대한 회원들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수도 성소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동반과 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을 모아 ‘깊은 강생으로 다양한 생명 공동체 구성’하고 ‘강생의 새로운 성소’를 실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총회 결정은 우리의 희망과 바램을 ‘바로 지금’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환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 뜻을 정한 것이기에, 18차 회기 동안 우리는 깊은 강생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다리를 놓으려 합니다. ‘깊은 강생으로 다양한 생명 공동체 구성’은 회원들이 강생의 영성을 더 깊게 하고 확장시켜 다양한 생명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강생의 새로운 성소’는 우리의 영성을 살아가는 대상과 방식을 평신도로 확장시켜 우리의 영성과 사명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강생의 영성으로 양성하고 동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성소 동반 방향을 ‘강생의 새로운 성소’로 재구성,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더 깊은 강생으로의 하느님의 초대이고 시대적 요청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홀로 외딴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시고 갈릴래아의 더 많은 주변 “다른 이웃 고을들(마르 1,38)”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고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복음의 절실함을 믿고 인간에 의하여 교회, 수도회, 사회문화 안에서 세워진 벽을 넘어 강생의 삶을 세상의 주변부로 확장해 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지금’이 세상 안에서 강생의 영성을 살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다양한 방식의 천막을 치고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강생의 새로운 성소’는 성소 계발을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따라 확장시켜 가며 우리의 영성에 따라 더 깊이 이동해 가는 것입니다. 강생은 이동해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만나는 대상이 달라지고 천막을 펼치는 범위가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강생의 새로운 성소’로 재구성하고 확장할 때, 통합적 기준과 원칙은 ‘강생’입니다. ‘강생은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라고 하신 설립자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사랑은 자율성과 포용성, 고유성과 통합성, 확장성이 조화를 이루며 ‘따로이면서 함께’ 끊임없이 연결되고 확장되어 갑니다. 강생의 천막 안에 성가소비녀회의 생명 공동체와 다양한 강생의 새로운 성소 공동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에페 2,21-11 참조) 강생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막을 치고 접으며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적 삶의 절실함에 대한 영적 감각을 보다 더 익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강생의 충만함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믿음에서 오는 영적 힘을 성령 안에서 얻어야 합니다.
밤길의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기에, 우리는 긴장하고 경계하면서 한발 한발 내딛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