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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묵주 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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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잎크로버 작성일07-01-22 14:33 조회6,5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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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묵주 한 개 나는 중학시절부터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좋아했다. ...마지막 한 잎이 남아 있는 그날 저녁에는 초겨울의 진눈깨비가 바람에 날리며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 잎새가 틀림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리라고 생각하고 밖을 내다본 존시는 그 마지막 잎새가 아직도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본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추위와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 강인한 잎새를 보면서 사경을 헤매던 존시는 생의 의욕을 느끼고 그때부터 극적으로 기력을 회복하여 건강을 완전히 되찾는다. 존시가 완쾌되던 날, 늙은 벌만은 죽음을 맞이한다. 바로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날 밤새, 벌만이 사다리 위에서 추위를 무릅쓰며 일생 일대의 그림,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 담쟁이 잎새 한 개를 벽돌담에 그리고 그날 이후 병을 얻어 외롭게 죽게 된다는 이야기. 소설 속의 `벌만`. 그는 실패한 화가가 아니고 작품 하나로 젊은 사람의 생명을 살려낸 위대한 화가이다. 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예술가라니! 나도 시인이 된다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고민 하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결국 그런 엄청난 시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엉뚱하게 의사가 되어 평생을 지냈다. 그리고 그간 부끄럽지만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생명을 구하는 자리 에서도 작은 역할을 했던 기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거의 40년이 된 내 의사생활은 파란만장한 온갖 경험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몇 해 전 좀 이른 은퇴를 할 즈음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가슴에 훈훈히 남아 있다. 내 은퇴 소식이 주위에 알려지자 여기 저기서 다투어 은퇴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 부산한 와중의 하루, 내가 일하는 병원의 홍보실장이 달려와 세계적인 패션 모델과 그 가족이 나를 만나러 내일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후, 그 유명하다는 모델을 보겠다고 몰려온 병원 사람들과 조명을 밝힌 이 도시의 3대 텔레비전 방송사 관계자들로 북적거리는 복도에 병원장의 인도를 받으며 그 모델이 들어섰고, 모델은 멋쩍게 서 있는 내게 반갑다며 껴안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 팔을 꼭 낀 채 기자들에게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열 살 때 입맛이 없고 자주 미열에 시달리며 등이 아팠다. 여러 명의 의사에게 진찰도 받고 약도 먹고 여러 검사를 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의사마다 진단이 달라 무슨 병인지조차 모르 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는 이모가 닥터 마를 소개해 주었다. 닥터 마는 자기 환자도 아닌데 귀찮아하지 않고 여러 검사 결과를 살펴보고는 몇 마디 묻더니 희귀한 백혈병이 틀림 없다며 당장 큰 도시에 있는 백혈병 전문병원에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혼비백산해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닥터 마가 무엇인가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더니 그 모델은 자기 가방에서 낡은 묵주 한 개를 소중하게 꺼내 들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후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병원에서는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가먕이 없었다며 어떻게 이렇게 일찍 희귀한 종류의 백혈병을 진단했는지 신기해했다. 결국 우리 식구는 닥터 마 때문에 살아나게 된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 묵주는 다시 돌려줄 수 없다. 이 묵주는 내가 평생 가지고 살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고 묵주기도를 자주하며 늘 감사하며 살겠다." 그 소녀의 병명을 정확하고 자신있게 진단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내 실력이었다기보다는 그 바로 며칠 전, 희귀한 소견에 대한 최신 논 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를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늘 지니고 다니던 묵주를 그때 병마에 시달리던 그 소녀에게 정신 없이 건네주었던 것도 그냥 우연만이었을까? 이제 나는 의사 일에서 은퇴하고 다시 어릴 때의 희망대로 시를 열심히 쓰려고 한다. 내 시로 감히 생명을 구하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마종기/시인. 재미의사 / 야곱의 우물 `07.1월호 에서 겨울 기도 글 : 마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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