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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한국 순교 성인에 관하여 ~(#1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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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잎크로버 작성일06-09-18 08:15 조회5,3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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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 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 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 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 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 (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 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가롤로), 유진길(劉進吉,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체칠리야), 동생 정정혜 (丁情惠,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 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 일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49의 아들이며 54의 오빠,49,54,57과 함께 체포됨)
이 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 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 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 (柳方濟)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 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 (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7은 누나)
정 국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경 천주교를 알게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와 함에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날로 체포되어 5월20일(음력 4월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김 아가타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 아가타는 김업이 막달레나,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에 김 아가타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 아기가 왔다고 그녀를 반겨 맞아 주었다. 그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 (8, 10과 함께 체포됨)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 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 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오는 가족들 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다.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3은 동생)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본래 수정(守貞)을 원했었는데, 혼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권유로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항상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밝은 교리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수계하던 김 업이 막달레나는 1836년 10월 김 아기 아가타,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66세였다. (5, 1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문`으로도 불리는 이 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이 광헌은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앵베르)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 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인해 이 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이 광헌은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형조에서의 혹독한 3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5월 24일 남명혁(다미아노)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은 처, 58은 딸, 21은 동생, 20, 21, 26. 58과함께 체포됨)
한 바르바라는 어려서 교우인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막달레나)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아가타), 김업이(막달레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 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7명의 교우와 할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그때 나이 48세였다.(5. 8과 할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15세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말 박 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 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 희순만은 언니, 전 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5는 언니, 25. 39와 함께 체포됨)
`문화`로도 불리는 남명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는 열심을 더해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 교우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서양 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 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려지길 원했던 성의회원 남명혁은 자신의 원대로 한창 나이인 38세로 순교하였다. (29는 처)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 베드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윈 후 결혼했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신앙으로 인해 권 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처남,아내,어린 자녀 등 4명와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후 권득인은 5개월 동안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17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예비 교우로 생활했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대해 회의를 품어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교우 친구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이후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그렇게 방해되느냐?"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의식(衣食)을 얻어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렇게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 성집은 l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했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몇일 후인 4월 7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과 고문을 참아냈다. 그후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도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 경 상경하여 부유한 교우인 황 마리아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때부터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수정(守貞)을 결심했으나 혼기에 이르러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3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서울의 이 영희, 이 정희 두 이모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고 인내하며 함께 갇혀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 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22,27의 조카)
과부가 된 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신문 중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 이시라 배반할 수 없읍니다" 하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나이는 56세였다.(1,7과 함께 체포됨)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김 성임은 결혼에 한번 실패한 후 상경하여 장님 점장이와 재혼했다. 이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1839년 4월 11일 김 성임은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후 이미 체포된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17,22,23,28,36과 함께 자수)
외교인 시절에 결혼한 이 매임은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이 매임은 조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를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어 조카 이영희가 수정(守貞)할 결심으로 외교인과의 결혼을 뿌리치고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39년 4월초 이 매임은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함께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이들 5명의 여교우와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임을 밝히면서 자헌하였다. 이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 52세였다. (36은 올케, 22, 28은 조카, 18, 22. 23, 28, 36과 함께 자수)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 (李光烈)과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고 마침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9, 21, 26. 58과 함께 체포됨)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경 형 이광헌과 함께 입교한 후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북경(北京)을 왕래하며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성세성사를 받고 귀국한 후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동정을 지키며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광렬은 4월 7일 형의 가족들 그리고 김장금과 함께 체포되어 회장인 형 이광헌과 똑같은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냈다.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 20, 26, 58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 영희 막달레나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許季任). 언니 이정희(李貞喜)와 함께 입교했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할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고모 이 매임의 집에 기거하면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체포된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교우들로부터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고모에게 의탁하고 있던 김성임, 김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언니 이정희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7차의 형문을 받고 드디어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고모 이 매임을 포함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호 순교했다 . 그때 나이 31세였다. (36은 모친,28은 언니, 19는 고모, 16은 조카. 18, 19, 23,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했고, 부모를 여읜 후로는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김 성임 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 명혁과 이 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살고 있는 여인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원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8, 19, 22,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9세 때 서울의 친척집에 들어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때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원귀임은 재빨리 피신했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 큰아기는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39년 4월 17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 후인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74세였다. (11은 동생, 11, 39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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